나를 찾아 왔던 봄의 전령사들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이형숙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것이라 했던가?

아직 봄이 멀리 있는데 지리산자락 끄트머리에서 찬바람을 등에 업고 산수유 꽃이 서둘러 달려왔다. 가까이 살면서 산수유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구례 산동마을에 가 본 적이 없다. 올해는 친구에게 얻은 산수유 꽃가지 하나를 유리병에 꽂아 놓고 달콤한 향기와 함께 작은 꽃들이 속삭이는 봄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추위를 밀어내고 양지쪽에서 싹을 틔우는 개나리도 관광단지 뒤쪽 오르막길에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진달래가 그 뒤를 이어 달려왔었다. 꽃샘추위에 비를 맞아 드러눕는 꽃잎들 사이로 봄이 가버린 줄 알았는데 따뜻한 양지에 앉아 진달래랑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디서 읽었을까? 색깔에 따라 진달래꽃 이름이 다르게 호칭된다는 것을. 하얀 진달래는 흰달래, 연한 분홍이면 연달래, 알맞게 붉으면 진달래, 너무 진하여 자줏빛이 나면 난초 빛이랑 닮았다하여 난달래라고 부른다고 했다.

얼마 전 어느 기자가 쓴‘문학 속에 핀 꽃들’을 읽으며 진달래과에 속하는 꽃들이 진달래, 영산홍, 산철쭉, 철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꽃을 구별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꽃잎이 아주 얇고 길쭉하며 잎이 없는데 꽃만 피면 진달래라고 한다. 참꽃이라 하여 잎을 따 먹기도 했었다. 철쭉은 꽃잎 안쪽에 갈색 반점이 있고 다섯 장씩 나는데 잎이 둥글고 주름이 있으며 잎과 꽃이 함께 핀다. 그 중에 꽃이 진분홍색이고 잎이 긴 타원형이면 산철쭉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잎이 작고 좁으며 화단을 장식하는 화려한 여러 색깔의 꽃은 영산홍이다.

이곳 남원에서는 1994년부터 5월이면 운봉 바래봉에서 철쭉제가 열린다. 바래봉은 그늘이 없어 5월의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1시간 이상 오르막길을 걸어야했던 지루한 기억이 먼저다.

온산에 카펫을 깔아 놓은 듯 장관을 이루어 몇 년 전 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꽃이 화려해지고 성숙해진 모습으로 변했다. 철쭉제를 찾아 온 많은 관광객들이 감탄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것은 내가 이곳에 살며 지리산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다.

땅바닥에 붙어서 고개를 쳐들고 봄을 전하는 꽃 잔디도 또 하나의 전령사다. 겨우내 죽은 듯 마른 잡초처럼 앞마당 돌 사이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꽃을 피웠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는 게 얼마나 귀엽던지, 작은 바람이 스치며 간질이면 깔깔거리며 웃는 것 같기도 하다.

이른 봄날 강변으로 밤마실을 나갔다가 꽃 터널 속에서 그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어느새 활짝 핀 벚꽃이 가로등 불빛과 어울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봄꽃은 빨리 지기에 미쳐 마중을 못나가 놓치곤 했었는데 올해는 잔치가 절정일 때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꽃 잔치가 한창인데 꽃을 시샘하던 봄바람이 비를 데리고 오던 날, 벚꽃 꽃잎은 길바닥에 하얗게 내려앉고 말았다. 허무하고 아쉬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벚꽃잔치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요즈음은 어느 도시를 가나 화려한 꽃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다. 팬지, 피튜니아, 메리골드, 베고니아인데 이 꽃들을 4대 길거리 꽃이라 부른다. 이 꽃들은 값도 싸지만 매연에 강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이 꽃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팬지라는 이름은 꽃모양이 명상에 잠긴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해서 불어의 팡세’즉‘명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진보라 빛 팬지는 꽃잎마다 진노랑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데 두 색의 조화가 너무 아름답고 신비스럽다.

수많은 보랏빛 나비들이 앉아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도란거리는 모습 같다. 꽃을 보는 사람들이 명상에 잠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어떤 꽃도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매혹적인 진보랏빛 팬지는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한다. 팬지는 언제나 내게 설렘으로 다가오는 봄의 전령사다.

이름 모를 풀꽃들이 서로 경쟁하듯 피어 있는 애기봉 가는 오솔길은 양옆으로 아카시 꽃이 지천이다. 멀리 멀리 향기로운 바람을 타고 와 봄을 선물하는 전령사. 향기에 취해 다리 아픈 것도 잊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모처럼 정상을 정복하고 돌아왔다. 깃털처럼 양쪽으로 줄줄이 달린 잎은 어느새 진한 녹색이었다. 왕성한 생명력으로 황폐한 땅에서도 잘 자라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치산녹화를 강조하며 속성조림을 위해 이 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어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전체산림의 10%를 아카시 나무가 차지했었다고 한다.

이제 장미의 계절 6월이다. 장미는 위대한 여름을 예고하며 도도하게 피어있다. 꽃 중의 꽃, 장미는 향기와 뛰어난 미모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부부가 사시는 골목 안 작은집은 넝쿨장미가 담 바깥에서 꽃을 피운다. 해마다 담 너머로 목을 길게 늘이고서 집안을 들여다보며 여름 내내 빨갛게 피어 있다. 마치 노부부를 지키는 근위병처럼 피어 있는데 올해는 키가 훌쩍 자라고 몸도 튼튼하게 굵어졌다. 아침 운동을 갈 때마다 이슬방울로 장식한 멋쟁이 전령사와 눈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여는 일은 즐겁다.

요즘에는 꽃들이 순서를 어기고 먼저 피어 속도위반을 하는가 하면, 일정을 바꾸어서 다른 꽃과 함께 달려 와 꽃을 피우기도 한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 꽃들이 헷갈리는 것이려니 싶다.

길어진 낮의 길이와 일조량의 많고 적음을 가리고 기온의 높낮이를 알아차리며 싹을 틔우고 꽃도 피운다고 한다. 꽃들도 각박해지는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아 종족번식을 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다. 서정주 시인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나보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하여 이른 봄부터 울어대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보다, 또 먹구름 속에서 울던 천둥소리보다 더 붉고 진한 봄의 전령사, 그들의 몸부림을··········.

< 계절의 여왕 5월을 보내며 > (2015.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