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과 문패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전통과 가문을 중시했던
우리 민족은 절차와 형식에도 특별했다. 사람의 존재 표시를 살아서는 집의 문패로, 사후에는 묘지를 표시하는 비석에서도 남다른 신경을 썼다. 그
옛날 높은 벼슬을 했거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표창한 내용을 붉은색 바탕의 솟을대문(紅門-홍살문)을 세우고, 그 홍문에 내 거는 현판을
패액(牌額)이라 했다. 그래서 홍문(紅門)과 패액(牌額)을 줄여서 문패(門牌)라 했다. 개인주택의 소유권이나 법률적 변동 표시로는 등기가 있고,
형식적 표시로는 대문에 문패를 달았다.
예나 지금이나 신혼부부가 내 집을 마련하기란 하늘에서 별 따는
것처럼 어려웠다. 나와 아내는 교직과 체신관서에서 박봉으로 신혼살림 셋방살이를 5번이나 옮겨다니면서 내 집 마련까지 이를 악물고 살았다. 아내는
내 집 마련 전까지는 아이들을 남의 집에서 눈치 보며 키울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큰딸(5살)과 아들(2살)은 시골 어머니 집에서 길러주셨다.
토요일에는 분유통을 사 들고 시골집에 다녀 오는 것이 일이었고, 올 때 아내는 언제나 눈물바다였다. 주중에는 어머니가 시골의 어려운 살림에서도
손자들을 키우시느라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이 많으셨다. 어머니는 어린 손자들에게 엄마·아빠 얼굴 익히기와 호칭을 가리킬 때 안방 벽에 걸린
아들·며느리 결혼사진을 가리키며 가르치셨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이 놀러 오셔서 엄마 아빠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둘이 동시에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가리켰다. 나와 아내가 갔을 때도 엄마 아빠의 얼굴도, 호칭도 사진으로만 각인된 어린것들에게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아내는 내 집 마련을 위한 생활 작전이 피나는 전투였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비 오는 날이 아니면 자전거로 아침에는 아내를 뒤에 태우고 같이 출근하기, 저녁때도 같이 퇴근하는 것이 예외가 없었다.
1970년대 서민 식량으로 유명했던 '통일벼 쌀'을 그것도 가장 저렴한 농협에서 구매하여 버슬버슬한 밥을 조석으로 몇 년이나 먹었을 때 불평
한마디 할 수도 없었다. 어쩌다가 손님이 들이닥치면 통일벼 밥을 지어 올릴 때 나와 아내는 부끄러워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목표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 생활이 불편할 뿐이지 오히려 기쁨은 더해갔다.
언제인가 방학 때 내가 시간적 여유가 있어
딸과 아들을 잠깐 데려다 놓았다. 엄마 아빠보다는 할머니를 찾으며 보채기 시작하면 속이 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에 출근해야 할 일이 생겼다.
비상수단으로 새끼들의 간식거리를 충분히 주고 셋방 집 방에다 가두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갔다. 골목길 나가면서 뒤돌아보니 새끼들은 셋방 집
유리창에서 골목에서 멀어지는 아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후다닥 학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남매 얼굴은 콧물 눈물로 뒤범벅된
채 아빠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부모가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결과를 어린 새끼들이 감수해야 하는 현실을 보고 그저 죄 없는 자식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또 다른 방학 때 군산 K여고 재직 시절이었다. 여고생들이 셋방살이하는 담임선생님 집을 기어이
온다고 했다. 나는 방도 좁고 누추하니 집 장만하면 오라고 했더니 그래도 사는 모습이 궁금하니 온다고 했다. 온다는 날 점심때 새끼들 점심을
미리 먹이려고 간장에 단무지를 작은 쟁반에 차려서 한창 먹이고 있는데, 골목 안에서 호호 깔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주인집 대문에서 ‘선생님’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먹이다 만 밥 쟁반을 벽장에 몰아넣고 부리나케 주인집 대문으로 달려가 쪽문을 열어주었다. 골목 상점에 나가 과자 빵
그리고 음료수를 점심 대용으로 사 들고 방에 들어오니 여학생들이 킥킥거리면서 웃음을 참느라 어쩔 줄을 몰랐다. 상황인즉, 학생들이 방에 들어왔을
때 분명히 밥과 반찬 냄새가 났는데 밥상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이상하다고 했는데, 우리 집 애들이 벽장을 가리키며 밥을 달라고 하길래 벽장문을
열어보니 먹다 만 밥과 반찬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담임선생님인 내 모습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5년간을 버티었더니 저축한 목돈과 약간의 은행 대출로 내
집 마련이 가능했다. 퇴근 때나 휴일에는 이곳저곳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뒤져가며 알맞은 집을 한 달가량 자전거 뒤에 아내를 태우고 내 집 마련을
위해서 다녔던 때가 그렇게 행복했고 가장 즐거웠다. 군산시청이 이사 온다는 인근 주택지역인 군산시 경장동 498-7에 대지 75평 건평 24평의
그림 같은 집을 샀다. 드디어 남의 집 문패로 그것도 쪽문으로 살금살금 드나들거나, 저녁 늦게 올 때는 그 쪽문도 닫아버려 자전거를 세워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담을 살짝 넘어갔던 생활도 끝났다. 아내와 나는 집 등기부 권리증을 서로 어루만지면서 임금님의 교지(敎旨)처럼 곱게 싸서 장롱
밑바닥에 넣어두었다.
아빠 엄마 결혼사진이 아빠 엄마로 알고 있는 딸과 아들을 데려다
놓으니 낯을 가리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로 쉽게 다가오지 않아서 또 한 번 가슴이 저렸다. 인근 석물 다루는 공장에 찾아가 『具然植』이란 문패를
주문하여 대문 기둥에 달았다. 이제는 법률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우리 집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학교 친목회에서 집들이가 성행했다.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40여 분의 선생님들을 모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신 선생님들은 지덕(地德)을 밟아야 한다면서 노랫소리가 담을 넘고 골목 안을 채웠다.
동네 사람들과 행인들은 담 밖에서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는 것처럼 기웃거려 미안하기도 했다. 며칠 뒤에는 형제들과 집안 어른들도 모셨다. 큰
외숙은 평소 건축업에도 종사하셨고, 나에게 늘 성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집 안팎을 샅샅이 둘러보시고 공무원 박봉에 집 장만하느라 수고했다고 등을
어루만져 주셨다. 역시 건축업 전문가답게 한 곳을 지적해주셨다. 거실 마루 밑에 통풍구가 없다 하시며 그대로 방치하면 마루가 서서히 썩는다고
하시면서 통풍구 위치와 개설 방법까지 알려주셨다. 그 뒤 여러 곳을 손질하고 그 옛날 간장에 단무지로 새끼들에게 점심을 먹였던 것을 기억할
여고생들도 별도로 초청하여 아내는 점심을 대접했다.
내 집은 백만장자한테는 초라한 오두막으로 보일 테지만, 나에게는
아내와 새끼들이 오붓하게 살아가는 행복의 보금자리였다. 아내는 피아노도 사들여 새끼들이 딩동댕하며 피아노를 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그때
골목길은 포장이 안 되어서 나는 담 밑에 코스모스를 심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 꽃잎처럼 하늘거리는 나비 떼가 날아와 우리 집 피아노 소리에 맞춰
춤도 추었다. 그 집에서 막내딸도 출산하여 그 막내딸이 출가하여 아기 엄마가 되었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 그 보금자리를 정리하고 처음으로 전주
시내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마지막 대문 기둥에 있던 문패를 떨리는 손으로 떼어서 잠깐 가슴에 품고 전주로 가져와서 보관하고 있다. 어쩌다가 군산
나들이를 할 때는 일부러 옛날 그 집 골목을 둘러보곤 한다. 그때 그 시절이 그렇게도 좋았기
때문이다.
(202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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